유교

자유인사전 - 자유인들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대하여[편집]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설파한 도덕적 철학. 후에 정치적 이념, 종교 비슷하게 되었다.

역사[편집]

등장[편집]

난세에 인(仁)은 땅에 떨어지고 모두가 패권을 위해 다투던 시대, 공자라는 양반이 이건 씨발 뭐가 잘못된게 아닌가 주나라땐 이런일이 없었는데라며 선비질을 하고다니며 인의예지를 설파하고 다니며 큰 인기를 얻으면서 유교는 시작된다. 싸우지 말고, 임금, 부모 섬기고, 이웃끼리 잘 지내자는 가르침을 MC공자가 펀치라인과 라임, 플로우로 엮어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공자는 이내 톱스타가 된다.

이후 중앙집권체제(황제)의 정치가 자리를 잡으며 동아시에 전반에 나라를 다스리는 지침으로써 유교는 큰 역할을 하게된다. 특히 오륜을 논한 맹자등의 유학 선비들이 등장하며 동아시아에 공자빠를 퍼뜨린다.

망함?[편집]

중국에 불교가 도입되며 유교는 변화를 겪는다. 천축국의 신비로운 철학들과 같이 들어오며 중국은 석가빠가 된다. 종교가 귀족주의적이 되면 퇴폐하기 마련. 땡중들이 나라를 썩혀버리며 불교도 정치적 타락을 겪으며 무너졌다. 그래서 주자가 불교적 신비주의를 유교에 대입하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우주란 무엇인가?'라는 대단히 고차원적인 철학이 생겨났는데 이게 성리학.

조선에서의 부흥[편집]

성리학은 고려 말에 한반도에 들어와 조선 초에 창달했다. 이이와 이황의 세대를 넘은 랩배틀은 이기론이라는 업그레이드 된 철학적 접근을 하게 했고, 이후 성리학은 조선에서 발달해 조선인의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래도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조선에서의 유학과 성리학은 철저히 주자의 해석에 의존해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라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경전에 대한 자의적인 연구가 전혀 없고 오로지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하고 이와 다른 의견은 모두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던 그 경직성으로 유교 자체가 교조화 되었다는 의견이다. 사실 양명학으로도 불리는 성리학과 주자의 주석은 당대 주류 유교계에서는 사이비로 치던 것이였는데, 이게 희한하게 국내 메인스트림 유교씬에 신드롬을 일으킨다. 여튼 이렇던게 나중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글줄도 못 읽는 백성들에게까지 양반새끼들이 아랫놈들은 윗사람 말 고분고분 들으면 된다는 교조를 강요했다. 사실 유생들이 공부한 유교 자체의 사상은 조선 초기에서 임진왜란 전까지는 신하들이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왕이 신하들 보기 부끄럽지 않도록 강요되어 안정적으로 글 잘 배운놈들의 공화정을 가진 중앙집권의 왕정체제를 가능하게 했지만 후기에 접어들 수록 쓸데없이 경직된 문화에 반해 그걸 강요한 세도가들은 문란해져서 결국 망국으로 치닫았다.

쇠퇴[편집]

그러나 이 역시 세월이 가며 쇠퇴했다. 유교의 본질은 희박해졌고, 그저 제사를 며ㅉ시에 지내야 하나, 며칠간 삼베옷을 입을것인가 따위의 형식화된 교조만 따라야 할 뿐이였다. 관료는 수직적으로 경직되어갔으며, 이는 정치를 문란하게 했다. 공자께서 늘 얘기하셨던 주나라의 예 란것은 보기 힘들어졌다.

현대에서 유교의 의미[편집]

악습과 구태함 만을 연상시키는 오늘날. 우리는 유교의 본질을 깨닿지 못한채 유교를 매도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분명 공감이 되는 우리의 삶이 지침이 될 수 있는 유연한 사상이다. 윗사람에게 잘 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이웃과 친해지는것. 이것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고, 가정을 평화롭게 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한국은 일제시대와 긴 군부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극도로 권위적인 사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유교에 뒤집어씌워 유교를 탓하며 권위주의라는 문제의 본질 흐린다. 조선 후기에도 권위적인 양반, 사대부, 지주와 관료들이 유교를 교조화 시키고 이 사람들이 현대에 오면서 정치인이나 법조인, 의사, 교육자 같은 권위가 있는 직종의 사람들과 자본가 같은 사람들로 교체된 것이다. 모든 권위적인 사회의 문제들이 유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